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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있는 삶’과 ‘국민 안식년제’, 말은 멋있는데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토마스 0 289

정치인 손학규(존칭 생략)가 그나마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적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을 때다. 밤낮없이 일하며 OECD 국가 중 최고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인의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신선한 문구였다. 노동시간은 길고 임금은 이에 비례하지 않으며 빈곤의 정도는 높아지는 희한한 구조에 대해 그가 가진 생각이 꽤 멋져 보였다. 이 정도 생각을 하는 정치인이라면 지켜볼 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어떠한 진전도 보이지 못한 채 지금은 이리 저리 떠다니며 자신이 꿈꾸는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신세로 전락했다. 만약 그가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 임금 격차, 비정규직의 문제를 포함한 사람들의 삶의 안정성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켜 왔다면, 그리고 다른 어떤 정치인보다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대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끝까지 멋있는 정치인 중에 한 명으로 남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가면 갈수록 ‘저녁, 그 딴 것은 배부른 소리’가 되고 마는 상황에 처해 있다.

 

 

‘대연정’, ‘대타협’을 외치며 민주당의 후보이지만 극우나 보수 집단에게 인기가 더 많은 기현상을 보이고 있는 안희정 후보가 ‘과로시대에서 쉼표있는 시대로’라는 제2 손학규 버전을 들고 나왔다. 멋지다. 매일 매일 피로에 찌들어 사는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이보다 반가운 말이 어디 있겠는가. 안희정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임금을 동결하고 여기서 재원을 마련해 신규 채용과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하면서 모든 국민들이 10년에 한번씩 1년 동안 휴식하는(혹은 휴식 기간 1년을 한꺼번에 사용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3년에 3개월이나 5년에 5개월씩 끊어 쓰는) ‘국민 안식년제’를 제안했다. 나름의 계산법도 있다. 예를 들어 평균 연봉 6,000만원인 정규직 1,000명이 있는 기업에서 매년 3.5%씩 인상되는 임금을 2-3년간 동결시켜 42억원 이상의 재원을 마련한 다음, 이중 25억 정도를 가지고 2,500만원 짜리 신규직원 100명(이 직원들이 안식년제로 휴식하는 기존 직원들의 일을 대체)을 채용하고 나머지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에 쓸 수 있다는 계산이다. 또 공공부문 안식년제를 도입해 추가 재원없이 공공부문 일자리 15만개 정도를 창출하고, 연차 휴가를 확대해 일수를 늘리고 사용하지 않는 연차 휴가를 길게는 5년까지 이월해 사용함과 동시에 10년에 한번씩 유급 안식년제를 도입하자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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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제 하면 가장 먼저 대학교수들의 안식년 제도가 떠오른다. 7년에 한번씩 1년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제도이다. 대학은 안식년 제도에 대해 비판이 생겨나자 ‘연구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정규직 전임교수들이 누리는 특권 중에 하나이다. 대학계의 노비 신분에 속하는 강사, 각종 비정규 계약직 교수들에겐 언감생심이다. 그래서인지 안식년제는 상류층 전문직군 종사자들이 누리는 것이고, 노동자들에겐 감히 넘보지 못할 제도처럼 보였다. 이런 면에서 안희정의 제안은 매력적인 면이 있다. 어떤 일을 하든 어떤 고용계약 조건 하에 살아가든 누구나 다 한 번씩 안식년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보편적 휴식 제도로서 전 국민 유급 안식년제가 실현되면 정말 좋을 일이다.

 

 

하지만 안희정은 번지수를 조금 잘못 짚었다. 생각이 선하고 바람직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안희정이 지금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비참한 노동현실이다. 안희정 캠프가 대다수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이로부터 개혁 방안들을 도출하기 위해 어떤 내부 연구와 토론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배규식, 황덕순 두 박사에 따르면, 현재 가장 안정적인 고용 상태에 있는 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1930만명)의 25%밖에 안 된다. 대기업 정규직 290만명, 공공부문 정규직 190만명이 여기에 포함된다. 나머지 75%는 중소기업 정규직(840만명), 대기업 비정규직(183만명), 중소기업의 비정규직(395만명) 등으로 구성된다. 가장 뒤에 위치하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395만명부터 역으로 위치시키면 노동자의 안정성 등급이 나온다. 즉 노동 안정성 A등급 480만명, B등급 840만명, C등급 183만명, D등급 395만명,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는 E등급이 수 십 만명에 이른다.

 

 

노동지표를 통해 본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한국의 최상위 10%가 하위 10%보다 4.79배의 소득을 벌어들여 가장 불평등한 미국의 5.01배 다음으로 2위인 나라, OECD 기준 ‘저임금 노동자(중위 임금의 3분의 2 이하)’의 비율 역시 미국(24.9%)의뒤를 바짝 따라 붙어 23.7%로 2위인 나라, 대기업 정규직 임금의 60%에도 미치는 못하는 중소기업 정규직 임금(대기업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정규직의 임금 수준이 비슷), 대기업 정규직 임금의 40%에도 미치는 못하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임금, 비정규직 노동시장에서 정규직 노동시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나라이다. 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정규직으로 가느냐, 비정규직으로 가느냐가 천국과 지옥의 문을 갈라놓는 절대적 관문이다. 한국의 소득 기준 최상위 10%가 전체 국민소득 가운데 차지하는 몫(소득비율)이 무려 50%에 육박하고, 나머지 50%를 하위 90%가 분배받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국민 100명이 있다면 이 중 10명이 부의 반을 가져가고, 나머지 90명이 반을 나눠 쓰는 형국이다.

 

 

그러나 수치는 실제 현실에서 직면하는 생존을 위한 고통과 몸부림을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 노동자들이 직면해 있는 처절한 생존투쟁과 노예상태에 가까운 노동 현장을 들여다 보지 않고 수치만 읽고 있노라면 현실에 대한 감각 능력이 떨어진다. 노동자의 삶을 살아보지 못한 많은 정치인들이 노동현실에 대한 수치를 암기할 수 있는지는 있지만 삶을 직접 살아보지는 못한다.

 

밤낮으로 과로를 해도 실질 임금은 줄어들고 빈곤 상태는 벗어나기 힘들다. 불로 수입이 최고의 수입원인 사회, 돈 놓고 돈 먹는 방식에 의존해야 하는 사회, 부동산 회전 투자가 중산층의 최고 관심사가 된 사회에서 화폐와 부동산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임금 노동자들은 몸 하나로 버텨야 한다. 기업 주주들은 가만히 앉아서 수억, 수십억, 수백억씩 배당을 받아가지만 제대로 된 휴식 공간도 없이 최저임금으로 과로를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노동자의 현실을 안희정은 어떻게 인지에 머물지 않고 감각할 수 있을까? 화장실에서 대학생들에게 눈치 보며 화장실, 강의실, 복도 곳곳을 끊임없이 청소하며 휴식시간까지도 눈치를 봐야 하는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1년짜리 계약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판에 10년 일하고 1년 휴식하자는 초현실적 발상에 대해 감사해야 할 까, 슬퍼해야 할까?

 

 

맞벌이로도 버티기 힘들어 멀티잡을 찾아야 하고, 알바까지 뛰어야 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노동자들이 거주해야 하는 주택, 자녀 교육, 의료비, 각종 보험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소득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식년 전에 매일 제대로 된 노동, 안정된 노동, 불안하지 않는 노동, 제대로 대접받는 노동,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고 즐거운 가족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노동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회 조건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로막는 힘들과 싸워야 한다. 사회적 대타협이란 노동하는 다수 국민들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조건에 기초해 수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임금을 인상하지 않고 모든 돈으로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하겠다는 발상은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선의’ 정도를 베풀면 된다는 발상의 다름 아니다.

  

 

손학규가 그랬듯이 안희정 또한 멋진 슬로건으로 폼 한번 잡아 볼 생각이라면 미리 그만두기를 요청한다. 말꼬리 잡을 생각도 없다. 노동자의 삶을 단 한 달이라도 살아보라. 그리고 다시 국민안식년제를 다듬어 D등급, F등급 노동자들과 함께 발표하기를 기대한다.

 

 

 

이영주(양평민주정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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